살아간다와 사랑한다는 발음이 비슷하다 물론 발음만 비슷한 것은 아니다    
신재욱(드라마터그)

리뷰를 쓰기 전에 잠시 생각해보았다. 나에게 ‘감자전스’는 무엇이었나. 기획 단계부터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나는 사실 감자, 감자 농사는 그 자체가 프로젝트의 목적이라기보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 생각했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기후위기에 대한 이야기에 불안해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간다. 도시에 살면서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에 점점 무뎌진다. 무엇보다 내가 그렇다. 그런 점에서 도시 생활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농사는 보다 직접적으로 기후위기의 영향을 받는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따로 또 같이 농사를 짓는 경험은 기후, 생태 등에 대해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돌아보니 그저 수단과 목적으로 딱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첫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참여한 분들은 각자 다양한 동기를 나눠주셨다. 원래 텃밭을 가꾸는데 감자도 함께 키우고 싶다는 분, 도시의 구석진 자투리땅에 무언가를 키워보고 싶다는 분, 그냥 감자전이 먹고 싶어서 왔다는 분, 그리고 태몽이 감자와 고구마라서 왔다는 분(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농담이었을까?) 등등. 어떤 동기로든 감자 농사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나눔(그것이 실용적인 정보든 개인적인 이야기든 뭐든)의 장을 만든다. 그리고 거기서 무언가 만들어진다. 그 무언가 중 하나가 기후나 생태에 대한 감각일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프로젝트 준비팀은 네트워킹 감자 농사라는 틀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갔던 것 같다.

어찌됐든 나도 내부인 겸 참여자로서 감자 농사를 시작했다. 다만 처음에는 농사를 그저 업무의 일환으로만 생각했다(감자가 생각보다 잘 커서 집에서 맛있게 먹긴 했다. 그냥 쪄서만 먹어도 맛있었다. 또 먹고 싶다). 나는 4개월 동안의 프로젝트 기간 내내 일종의 관찰자처럼 행동했다.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에 글은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 틈틈이 네트워킹 농부님들이 올려주는 사진과 글을 읽었고, 감자 일기 역시 주기적으로 (몰아서) 읽었다.

농부님들이 공유해준, 각자의 자리에서 감자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는 사실 엄청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 ‘특별하지 않음’이 내게는 매우 각별하게 느껴졌다. 씨감자를 심은 후 감자 싹은 언제 나오는지 안달복달하고, 감자 싹이 난 것을 발견하고 ‘동네 사람들! 우리 감자 싹 난 것 좀 보세요! 너무너무 예쁘죠!!!’ 자랑하고, 그러다가도 감자알이 굵어지게 하려면 줄기를 솎아주고 꽃도 따버려야 한다는데 이게 정말 감자를 위한 일일까? 고민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알이 굵은 감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치여 감자를 너무 챙겨주지 않은 것에 미안해하고, 또는 잊고 있던 감자가 가끔씩 떠오를 때마다 ‘아 맞다!’ 하면서 부랴부랴 물을 주러 가고(뜨끔)……

어쩌면 농부님들 각자가 감자와 함께 하며 갖게 된 그 ‘마음 씀’을 일종의 가슴앓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농부님들마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그 가슴앓이는 모두 감자와 꽤나 가까운 관계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사실 농부님들이 혼자서만 감자를 키웠다면 이렇게까지 감자 때문에 가슴을 앓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감자에 대한 이야기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공간을 통해서 서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보다 관계성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제 갓 초보 티를 벗어난 감자 농부의 언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북주기’처럼 말이다.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가 각별하게 느껴졌다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뭔가 상투적인 말 같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관계가 정말 각별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감자는 어느새 농부님들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 관계가 느슨하든(나처럼…) 아니면 정말 끈끈하고 소중하든, 그저 마트나 시장에서만 보던 감자라는 대상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내게는 놀랍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먹는 대상이 기르는 대상으로, 또 기르는 대상이 결국 함께 사는 존재로 변화해가는 이 관계맺음의 과정 말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준비팀 내에서 이런 질문이 있었다. 따로 또 같이 감자를 기르는 것이 어떻게 공연이, 혹은 예술작업이 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그저 몇몇 작업에 텍스트 정도로만 참여했기 때문에 공연이나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예술의 목적 역시 참여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예술이 다른 학술적인 방식이나 사회운동의 방식과 다른 점은 그 전달의 방식이 일방적이지 않으며 전달하려는 메시지 자체도 완전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고 생각했다. 참여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감각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메시지가 더욱더 풍성해지게 만드는 것. 그렇게 본다면 이번 감자전스도 충분히 예술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돌아와서, 나는 농부님들이 갖게 된 이 관계맺음의 경험이 언제 어디에서든 다른 관계맺음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그렇게 더욱 풍성해지는 것을 상상해본다. 이미 다양한 뻗어나감의 계기를 농부님들이 나눠주셨다. 감자와 함께하면서 여러 다른 식물들도 함께 키우게 되었다고, 감자를 키우면서 땅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수확과 원예의 개념을 벗어나 자연과 감자의 시간을 보고 싶었다고, 가뭄을 감각하고 감자와 오래오래 공존하기 위해선 어떤 힘이 필요할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등등. 여러 농부님들의 가슴앓이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그 관계맺음과 뻗어나감의 경험들이 내게도 전해져 왔다.

글을 마치려 한다. 이 글 다섯 번째 문단 첫째 줄에 ‘함께 살아가는’이라고 쓰려다가 어쩌다 ‘함께 사랑하는’이라고 써버렸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마 한 농부님이 감자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라고 쓰고 고백 영상이라고 읽는다)가 떠올랐기 때문인 것 같다. 대략 생각나는 내용은 이렇다. ‘어떤 모습을 하든 그냥 감자 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기뻤어. 수확한다고 해서 헤어짐은 아닌 것 같아. 감자는 사실 세상 어디든 있으니 항상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게. 고마워.’

무엇보다 그 다정한 말투가 기억에 남는다. 이 관계를 감히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적어도 그 영상에서 이 관계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 다른 농부님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까 비록 감자전스는 끝났지만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살아가기로, 사랑하기로 해요. 함께한 모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